Insight/Book

인간 실격 - 다자이 오사무

샤니샤니 2017. 5. 31. 10:59

크레마 샤인으로 읽은 첫 책이고 또 그렇게 읽은 책의 첫 감상문이다. 티스토리 이사 후 첫 감상문이기도 하다. 

 민음사 번역으로 읽은 건 아닌데 표지 그림이 에곤 쉴레의 자상화길래 이미지로 넣어보았다. 


 이 책은 요조라는 인간이 인간들 틈에서 그들과 섞이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방황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방황이란 것이 내 기준으로는 '방황'이라는 낱말만으로 될까 싶게 삐딱선을 크게 타고 망가지는데, 놀랍게도 작가의 실제 삶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일 뿐 아니라 작가가 젊은 나이에 자살해버리기까지 했다. 즉,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좀 고지식하고 겁이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들이 풍부해지고 공감할 수 있는 감각들이 더욱 예민해진다고 느끼는 나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중학생 때 읽었다면 더욱 좋았을 책인 듯 싶다. 




<첫번째 일기>


 키티님.

 저는 글을 읽을 줄 알게 된 때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는데, 특히 한 질 짜리로 있었던 총 13권의 세계 문학 전집을 가장 좋아했답니다. 옛날 책이라 '커피'는 '코오피'라 적혀있고, '습니다'는 '읍니다'로 되어 있는 책이었는데 요정, 콘도르, 동굴 속에 숨겨놓은 금은보화 같은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해서였습니다. 흔히 그렇듯 마음 씀씀이가 넉넉한 아이가 진심으로 남을 도와주고 그 보답으로 행복해진다든가, 사실은 그러한 고운 성품이 고귀한 혈통의 증거였다든가 하는 내용들이었는데, 참으로 저같은 어린 애의 마음 속에 '나도 착하고 바른 아이가 되어 남을 도우며 살아가야지'하는 순수한 결심을 꼭꼭 심고 다독여주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제가 다닌 유치원에는 아직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스케치북에다가 '가'를 적고 그 옆에 가위를, '나'를 적고 그 옆에 나비를 그리도록 하셨었지요. 저는 가위 대신 가지를 그리고, 나비 대신 나팔을 그려서 칭찬을 듣곤 했습니다. 금세 저는 글자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아이가 되어 인기를 끌게 되었답니다. 아이들은 제 스케치북을 곁눈질로 훔쳐보고 따라 그리곤 했지요. 저는 마음 속으로 조금 우쭐해했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습니다. '자' 옆에 자전거를 그리던 제 옆 자리 친구가 자전거를 따라 그리다 스케치북을 몇 번 찢어내버렸습니다. 그리곤 제게 자전거를 자기 스케치북에다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지금의 저라면 ㅡ이미 훌륭한 인간의 하나로 성장했기 때문에ㅡ 아마 흔쾌히 수락하고서 슥슥 그려주고는 말았겠지요. 크게 정성을 쏟지는 않아가며, 선심 쓴다는 듯이 온화한 미소까지 보여줄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일곱살의 저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 책을 좋아하는 어린 애에 불과했었지요. 저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림을 직접 그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직접 그리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직접 그리는 것이 너에게 좋을거라고 이야기해주었지요. 물론 대단히 유감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말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진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는 다음날부터 제가 그림 잘 그린다고 잘난 척을 했다면서 제 험담을 늘어놓고 다녔습니다. 저는 어쩌면 좋을지 몰랐어요. 그 친구에게 가서 사과를 해야할까? 하지만 저는 친구를 위해서 그랬던 것이기에 '사과'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친구에게 가서 화를 내야할까? 하지만 그 친구가 잘난 척으로 느낀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별 수 없이 적당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 조금 풀이 죽어있어야 했답니다. 

 

<두번째 일기>

 

 키티님.

 저는 집 근처의 아주 작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14명 정도의 친구들이 있는 곳이었지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나니 친구들과 선생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가장 큰 목소리로 발표를 했고, 받아쓰기는 항상 100점이었으며, 그림 대회에 나가 상을 타오곤 했습니다. 친구들에게도 항상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하고, 가위를 달라고 하면 가위를 건네주고, 누군가 꾀를 부려 쓰레기통을 안 비우면 재빨리 비워놓고서 혼자 흡족해하는 아이였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친구들은 제 이런 점을 이용하게 되었지요. 저는 점차 친구들을 위해 기꺼이 해주던 일들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몹시 속상한 일이었답니다. 더 이상 착하고 바르고 남을 돕는 아이가 아니게 된 것 같아서 말이에요. 

  

 다음에는 여자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갑자기 90명 가량의 친구들이 생기게 되었지요. 정말 두근거렸지만, 입학하고 난 뒤 얼마 안 있어 학교에서 폭력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전해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친구들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요. 나와 즐겁게 인사했던 친구가 다른 친구를 아프게 때렸다는 것이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완 달리 성적에 굉장히 민감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몹시 피곤했습니다. 특히 중학교 2학년 때는 저보다도 제 점수를 더 줄줄 꿰고 있는 친구로 인해, 요조처럼 광대짓을 하기로 마음 먹기까지 했습니다. 방정식을 일부러 틀렸던 것이지요. 잘 풀 수 있었지만, 칠판 앞에 나가 풀 때마다 도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백묵을 내려놓곤 했습니다. 이것은 제가 가장 후회하는 어릴 적 행동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다 결국 방정식을 정말로 잘 못 풀게 되고 수학을 싫어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음엔 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크고 작은 폭력 사건들에는 크게 놀라지 않게 되었지요. 하지만 고3 때 겪은 친구의 죽음은 여전히 너무나 슬픈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함께 할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이 되고만 그 날, 학교에서 점심으로 떡볶이를 시켜 먹고 있었는데 친구가 너무 많이 뺏어먹는 걸 보고 적당히 먹으라 핀잔을 줬었어요. 한번도 그런 핀잔을 준 적이 없었는데 하필 그 날 그 친구에게 그랬던 것이지요. 저는 너무 후회가 되어 다음부터 누가 뭘 뺏어먹어도 결코 불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곁의 누가 언제 어떻게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품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일기>


 키티님. 

 저는 제가 지망하던 그대로,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답니다. 우연한 기회로, 저는 2학년 때 사회과학대 학생회 임원이 되었습니다. 엣헴! 그리고나선 교내 청소 노동자 영어 교실인 'M'(물론 이것은 가명입니다)을 기획했습니다. 평소 외국인 교수님 방을 청소하실 때 의사소통이 안 되는 고충이 있다고도 하시고, 또 쌩 하니 지나가버리는 학생들에게 섭섭함을 느낀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 마음이 맞는 친구들 몇몇과 함께 'M'을 만들었습니다. 목표는 영어 가르쳐드리기, 학생들과 청소 노동자가 가까워지도록 돕기!


 알파벳을 하나 하나 짚어가며 가르쳐드리는 건 지루할 법도 했지만 제 친어머니께 가르쳐드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한 어머니께서, 쓰레기통을 비우고 오겠다는 것을 외국인 교수님께 "trash, down."이라고 말했더니 그 교수님이 놀라워하더란 이야길 전해주셨을 땐 우리가 목표했던 걸 이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습니다. 

 학생들과 청소 노동자가 가까워지도록 돕기 위해서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노래 공연을 하기로 했습니다. 대학교와의 첫 만남인 자리에 청소 노동자가 함께한다면, 자연스레 대학 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여겨서였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쉬운 팝송과 트로트를 연습해서 무대에 섰습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저는 감격해서 분회장님을 부둥켜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할 말이 있느냐 묻는다면 어깻죽지를 붙잡고 울먹이며 한나절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제가 행동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으면 너무나 괴로워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남들 앞에서 결코 티를 내지는 않지요. 그러나 제가 속으로는 이것이 옳다고 여기고 있으면서 저것을 할 수 밖에 없을 때 저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그 날 밤 일기장에 몇 장씩을 빼곡하게 힘겨운 마음을 토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답니다. 그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키티님.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학교의 일은 아직은 너무나 가깝고, 기억할수록 선명해짐과 더불어 아직도 생각해 볼 여지가 많기 때문에 글자로 적어두기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그 안네 프랑크도 당신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고백했는데, 그 애보다 몇 곱절은 평온하게 이 나이 먹도록 살아온 제가 이렇게 겁을 내서야 비웃음만 사겠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겁쟁이이기 때문에, 이미 제가 숙고하여 내린 결정에 있어서도 그것이 옳았는지 아니었는지를 의심하고 곱씹는 성격이기 때문에, 남보다 제 자신에게 짜증나리만치 엄격하기 때문에, 무신경함에서 비롯되는 상처를 줄 일도 없고 언제나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저 역시 이런 마무리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랍니다. 언젠가 저 대학시절 이야기도 제게 덤덤해질 날이 올 때, 다시 말씀 드리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