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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서 쓰는 블로그
우리집 본문
지난 주말 집엘 다녀왔다. 2주에 한번씩 반차를 주는 고마운 회사 덕분에 금요일 저녁 버스를 타고서. 두 밤 자고 온다는 게 너무 신이 났다.
낮에는 여름만한 볕이 제법 내리쬐지만, 풍경 속엔 어느덧 가을이 스며든 게 보인다. 투명도 50% 짜리 그라디언트를 한꺼풀 씌운듯이 위에 하늘은 파랗고 아래 장미꽃은 노랗다. 선선한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치는 벼를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마음이 평화롭고 풍요로워지는지. 벌써부터 겨울 생각을 하는지, 장미 꽃잎은 아예 드러누운 양 늘어진 채로 햇살을 담뿍 머금는다.
정말 가을이 온걸까? 일기장을 펼쳐 봄 날짜를 살펴보면 이것저것 생각의 씨앗들을 잘도 뿌려뒀는데- 그 중 꼭꼭 눌러심은 것은 몇 가지 안 되고 지금 수확할 만하게 키가 자란 녀석들은 더 적다. 그렇지만 꽤 치열하게 살았고, 부지런히 배웠다. 차분히 가다듬었는 지는 아직 쑥스러워서 못 적겠다. 그렇지만 작년보다 엄마 아빠를 더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내 마음은 더 튼튼해졌다.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면 풍기는 냄새. 지금은 이렇게 밖에다 널지만, 어릴 적 살던 집엔 고추를 말리는 하우스가 따로 있었다. 그래서 그 하우스에 들어서면 투명한 황토색에 약간 눅진하면서도 건조한 냄새가 훅 났는데, 지나가다 괜히 들어가서 코로 들이마시고 다시 닫고 나온 적이 있을만큼 내가 좋아하는 냄새였다. 저 나무로 된 발은 직접 잘라 다듬은 나무에, 줄로 돌을 감아 엮어 만든 발이다. 그 위에 얹은 종이는 닭 사료를 담은 포대의 위아래 실을 산산히 풀어서 펼쳐 쓰는 것이고.
고추를 따는 건 곳곳에 복병처럼 숨어있는 곤충들 때문에도 어렵지만 내내 옹송그리고 일해야 해서 몹시 고된 편이다. 그래도 그렇게 딴 고추를 물에다 깨끗이 씻고 천으로도 훔친 뒤에 와르르 종이 위에 쏟아 널 때- 아니 사실은, 다 널고나서 괜스레 고추를 담아온 광주리를 뒤집어 탁탁 두 번 칠 때! 기분이 얼마나 상쾌하고 좋은지 모른다.
한 번은 우리 고추 하우스에 참새 두 마리가 날아들어왔다가 나가는 문을 못 찾아서 갇힌 적이 있었다. 부산하게 날아다니는 통에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한 마리는 밖으로 나가고, 다른 한 마리는 결국 기진맥진해서 내 손에 그만 잡히고 말았다. 참새를 키우겠다고 어떻게 허락을 받을까 고민하면서 플라스틱 통에 새와 함께 쌀을 좀 넣어뒀다. 이름은 벌써 피죤이라고 붙여둔 상태였다. (이 종種을 초월한 이름은, 포켓몬스터 피죤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땐 너무 어려서 피죤이 비둘기인 지 몰랐다.)
엄마 아빠한테 보여드렸는데, 아빠가 벌레를 잡아다 줄 수 있으면 키워도 된다고 하셨다. 쌀을 주겠다니까 아직 어려서 벌레만 먹을 수 있다셨다. 그러고보니 넣어둔 쌀 알갱이가 그대로였다. 벌레를 못 먹으면 굶어죽을 거라고 하셨다. 참새 친구가 정말 갖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벌레를 잡아다 먹여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그 때 처음으로, 날개가 있는 애들은 있는 힘껏 하늘 위로 던져올려도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높게 더 힘차게 날아갈 수 있단 걸 알게 됐다.
우리 엄마는 소녀 시절 일기장부터, 아빠와 나눈 연애 편지를 지나, 가계부 맨 윗칸 일지까지 모두 빼곡히 채워뒀을 뿐 아니라 그걸 몽땅 차곡차곡 보관해 온 사람이다. 엄마 일기장엔 '시간은 금이다' 같은 경구에서부터 엄마가 직접 그린 양파, 마늘, 옥수수 그림들이 삽화처럼 글과 어우러져 있다. 연애 편지는 못 보게 하시니까 읽어볼 순 없었지만, 맨 마지막 발신인이 '영의 순'이라고 적혀있었다! 일지는 글자 몇 개로도 날 펑펑 울릴만큼 얼마나 또 잘 쓰였는지. 고추 모가 다 죽어버렸던 과거 어느 날에 쓰여진 일지는 지금 생각해도 그 절망감이 어깨서부터 느껴질 정도다.
난 얼굴도 호기심도 성격도 아빠를 더 닮았지만, 내가 좋아하는 내 재주들은 사실 다 엄마로부터 물려받았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거라든지, 그림을 그리는 것, 노래하는 것, 작은 걸 보고 기뻐하는 것ㅡ엄마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보시고 난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엄마가 "영선아, 빨리 와 봐!!!"하셔서 화들짝 놀라 달려갔더니, 창 너머 바람이 들어와 캔들 홀더에 모빌처럼 달린 아기 천사들이 빙글 빙글 돌아가는 모습을 보라시는 거였다. 참 신통방통하다고. 시집 살이를 하면서, 우리 오남매를 기르면서 겪은 풍파가 얼만데ㅡ아기 천사가 나팔을 불며 날고 있다고 순수한 기쁨으로 한참을 감탄할 수 있는 그 감수성이 자못 감동적이었다.
엄마한테 물려받은 손재주로, 엄마를 위해서 해드린 네일. 난 사실 화려한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색도 단순하고 심플한 재료 밖에 없었는데, 다음에 동대문 가선 엄마 취향으로 큼직한 펄이 든 컬러젤이랑 번쩍번쩍한 부재료를 잔뜩 사와야겠다. 그리고 우리 엄마 프렌즈팝하시는 실력을 보니까 닌텐도 위 사드려도 될 것 같다. 스포츠랑 마리오 카트 사드리면 두 분이서 재미나게 하실 듯.
우리 아빠는 칠십이 가까운 나이에도 아기처럼 방긋 웃을 수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흰 머리도 엄청 예쁘게 나서 하나도 안 지저분해보인다. 아빠는 군 시절 통신병부터 군무원을 거쳐 지금까지도 쭉 전기 관련된 기술자로 일하고 계시는데, 동네 사람들 모두 가전 제품이 망가지면 우리 집에 찾아와 도움을 부탁하곤 했다. 난 아빠의 그런 모습이 좋았고, 좀 우습지만 그래서 중3 때 과학에서 전기를 배울 때 특히 열심히 공부해서 백점을 맞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아빠가 알고 계신 게 단순히 기술적인 부분에 그치는 게 아니라 상당히 깊이가 있단 걸 발견하게 됐다. 특히, 라디오를 제작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 지부터 어떻게 만드는 건지- 그리고 음향기기를 만들 때 어떻게 하면 소리가 찢어지고 어떻게 하면 그렇지 않은지- 이런 것들을 알고 계시는 건 놀라웠다. 이런 지식이 아깝다고 하자, 아빠는 젊은 시절 전기 기능사 자격증을 따려다 포기했던 이야기를 해주셨다. 영어 투성이인 전기 기호와 수학 계산은 아빠에게 너무 어려워보였던 모양이다. 정작 지금은 자격증만 있지 까막눈처럼 모르는 사람들에게 아빠가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주느라 바쁘시지만 말이다.
이제 아빠가 또 퇴직하시게 되면, 아니 실은 지금도 아빠한텐 이 전기 기능사 자격증이란 건 필요 없다. 알아봤더니 문외한인 사람 기준으로 99강 짜리 인강 3회독 정도로 필기를 독학하고, 학원에서 실기를 준비한다고 한다. 인강은 커녕 앉아서 공부하는 것도 아빠에겐 낯설테고 영어나 수학에 대한 두려움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내가 아빠랑 같이 준비한다면? 내가 아빠 필기 시험을 도와드리고, 아빠는 내 실기 시험을 도와주시고. 나는 아빠 영향인지 원래 전기-통신-기계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공부하기 즐거울 것 같다.
빠르면 내년 여름에 아빠께 제안하게 될 것 같은데, 그렇담 그 전까지 중국어는 HSK 6급을 따놓아야겠지. 그리고 아빠가 거절하시거나, 아무리 같이 공부한대도 거주지가 달라 서로가 어렵다고 판단이 되면 플랜 B로 생각해둔 게 또 있다. 아빠랑 같이 직접 라디오 만들어 보기! 전자 상가에 가서 부품을 사고, 아빠 작업실에서 만들면 될 것 같다. 이건 생각만 해도 엄청 재밌다.
엄마 아빠는 고양이를 원래 싫어하시는데, 얘가 임신한 몸으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 어느 날 우연히 얻은 고양이 사료를 좀 퍼줬더니 그 다음부터 우리집에 뻔질나게 와서는 이렇게 제 집인 양 누워있는단다. 난 길고양이인 줄 알았더니, 심지어 주인이 있는 고양이였다! 그러면서도 태연하게 우리 집에 와 밥 더 달라고 야옹 야옹 거리는 거였다. 몸은 말랐는데 배는 남산만한게 안쓰럽기도 하고 힘들어보인다. 또 귀여우니까 쓰다듬어줬는데 문득 너무 부러워졌다.
나도 다른 집이 있지만- 너처럼 밥 먹고 싶을 때 그냥 쓱 우리집에 올 수 있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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