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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샤니샤니 2017. 8. 13. 21:42


 대학교 때 홀로코스트 사건을 가지고 한 학기 분량 강의를 짜는 프로젝트를 한 적이 있었다. 나까지 총 네 명이서, 몇 달간, 심지어 몇 차례는 밤까지 꼬박 새가면서 '인간과 악의 평범성'이라는 강의를 완성했고, 값진 지식과 교훈들은 물론 1등 상금 400만원까지 얻게 되었었다. 어떤 주제 하나를 골라선 잔뜩 책을 빌려다 쌓아둔 채 몰두하고, 생각의 실을 엮었다가 풀었다가 하는 걸 언젠가 또 할 일이 있으려나...? 내게는 정말 소중한 대학 시절 추억 중 하나다.  

 당시 우리의 메인 테마는 악의 평범성이었고,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사용된 아이디어가 주된 내용이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 사건의 잔혹함이나 끔찍함 같은 것들과는 가능한한 거리를 두고자 노력했고, 자연스럽게, 저자의 수용소 생활이 담겨있다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의 참고 서적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영화 '덩케르크'를 봤는데, 애초에 성공한 작전을 다룬 영화니 그렇지만서도 너무 평온한 느낌이라 ㅡ내가 워낙 절망적인 전황과 추악한 인간의 내면을 그린 것들을 많이 봐와서일지도,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평면적이고 정의로웠다ㅡ 아 오랜만에 머릿 속 바다에서 건져올린 2차 세계대전을 이렇게 도로 담가두기엔 아쉬워서, 이왕이면 생생하고 내적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골랐다,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건 그렇게 생생하게 수용소의 생활을 그리지도, 신음을 토해내며 괴로워하지도 않는 책이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책이었다.


 * '삶의 의미'와 로고테라피

 빅터 프랭클은 원래 의사였다. 그는 수용소에 들어올 때, 그동안 집필해온 원고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모든 연구와 과거의 업적을 담은 결정체가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용감하게도 그는 절망 대신 열정을 택한다. 다시 쓰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다시 그 원고를 써야만 한다는 압박감은 그가 정신줄을 놓을 틈을 주지 않고 치열하게 살게 했다. (이 사람 책엔 수용소의 생활이 선명하게 묘사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책은 많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영화 '피아니스트'를 봤던 경험이, 이 엘리트 유대인의 수용소 생활을 상상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자체로 아름다운 영화기도 해서 추천!)

 양귀자의 '모순'이란 책이 바로 이런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부유한 집에서 온화하게 살아가는 이모는 자살해버리고 억척스럽게 딸을 키워내며 매일 눈물과 고생이 마를 날 없는 엄마는 일본인들한테도 팬티 한 장 더 팔려고 마지막 페이지에서조차 일본어 공부를 새롭게 시작한다. 그것이 귀퉁이가 쩌든 지폐 한 장 더 손아귀에 쓸어담는 속물적인 것일지라도, 인간의 삶에는 뭔가 나름의 의미가 있어야한다. 이건 윤리적인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 개별 인간 자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미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인간은 살 수 있다.

 내 삶의 의미는 누가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우리 회사에서 음악 방송을 할 때면 뙤약볕 아래서든 고드름 아래서든 아이돌을 기다리는 팬들이 한결같이 줄지어 서 있다.  난 그 모습이 하나도 한심해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적극적으로 실행해나가며, '의미'있는 하루하루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므로. 내 눈에 안타까운 사람들은 오로지 관성에 의해, 매일 매일 정해진대로 무감각하게 그저 24시간 동안의 존재함을 반복해나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장성한 자식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설상가상으로 은퇴까지 해버린 노부부가 빈 둥지 증후군에 시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의 삶을 지탱해오던 자식들 먹이고 입히기라는 의무감이 사라져버리면,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해 혼란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엄마와의 통화로, 아빠가 내년 여름까지만 일하실 수 있단 말을 전해들었다. 그래서 내년 아빠 은퇴 시기에 맞춰 부모님을 모시고 괜찮은 여행을 떠날 생각이다. 좋은 구경도 많이 시켜드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요량으로. 엄마 아빠의 삶의 여정이 종착역에 가까워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계속 진행중이란 걸, 그걸 확실히 알려드리려고.) 

 오늘날 사회를 살아가며 돈 이외의 것에서 어떤 가치나 의미를 끄집어내는 게 쉬운 것은 아니지만, 자기 생의 의미를 돈벌이로 규정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3가지 방법으로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성취로, 둘은 시련으로, 셋은 사랑으로. 성취가 가장 쉽고, 사랑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어려울 일일수록 아름다운 건 이것도 마찬가지로구나.



 인간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명제를 가장 아래에 두고 저자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하는데, 이들은 환자가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게 함으로써 그를 치료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식이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을 지경이라고 펑펑 우는 환자에게, 그렇담 왜 자살하지 않죠?라고 되묻는 것이다. 그럼 환자는 잠시 당황하면서 자살하지 않은 자신에 대해 해명하게 될 거고, 스스로 자살하지 않는 이유,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된다는 것. 

 이 대목을 보고 너무 깜짝 놀랐던 게, 20살 때 마주했던 의사 한 명도 이런 방식으로 날 대했었기 때문이다. 20살 3-4월의 난 마음이 참 힘들었었는데, 급기야 수업 시간에도 자꾸 눈물이 흘러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용기 내서 학교에 있는 심리 생활 상담소를 찾았다. 상담 스케쥴을 잡아주는 분의 왜 왔냐는 질문에 답 대신 펑펑 우니까 그 분이 어쩔 줄 몰라하면서, 내 스케쥴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주셨다. 며칠 뒤 찾은 그 곳의 상담실에서 의사와 마주한 채, 난 똑같이 왜 왔냐는 질문을 받았고 또 펑펑 울며 이야기를 했는데 이번엔 반응이 달랐다. 냉담한 목소리로,

 "그 때도 이렇게 될 거 몰랐던 건 아니잖아요? 왜 그 때 이거 말고 다른 걸 선택 안 했어요?"

 이 때 난 너무 충격 받아서 눈물을 뚝 그쳤고,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멍한 상태가 되어 상담을 대강 마무리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뒤늦게 상처 받은 마음으로 또 한참 침대 위에 엎드려서 울었다. 이후 두번 다시 심리 생활 상담소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기장엔 저 되물음이 매번 맴돌았다. 어려운 두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했지만, 선택하지 않았던 다른 하나로 인해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러나 돌이킬 순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선택을 한 건 나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슬픔은 내가 응당 감수해야할 것이었고, 그 슬픔의 크기를 상쇄하려면 선택한 것에 대해 최대한 충실하여야했다. 즉, 내 선택을 의미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어쨌든 저 일은 내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자기 연민 같은 건 이제 나하곤 거리가 먼 단어가 되었다. 오히려 너무 엄격하다고 볼 수 있다!


* '떠밀려서'와 '테헤란에서의 죽음'

 가장 최근에 갔던 미용실에서 미용사 아주머니가 돌연 '꿈' 이야기를 했다. 미용실에서 시덥잖게 연예인이나 남자 얘기 하는 걸 따분하게 여기는 나로서는, 굉장히 신기하고 반가운 대화 주제였다. 아주머니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원장이었다가 원장님의 건강 문제로(둘은 혈연관계가 아니다) 샵을 이어받아 운영 중인데, 사실은 1인 헤어샵을 내는 게 꿈이라고 했다. 이렇게 큰 샵에서 밤 늦게까지 빽빽하게 예약을 받아 돈을 많이 버는 건 자기에게 큰 의미가 없다면서.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유동적으로 시간을 사용하면서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다만 자기한테 이 꿈의 실현에 대한 원칙이 하나 있는데, 반드시 '떠밀려서' 하자는 것이라고 했다.

 아주머니 말씀을 기분 좋게 듣고 있던 나는 저 '떠밀려서'를 듣자마자 말의 이음새가 어긋난 기분이 들어 곧장 되물었다. 

 "떠밀려서요?"

 "네, 떠밀려서요. 음... 혹시 종교 있으세요?"

 "아뇨. 그런데 꿈을 이루시는 데엔 아주머니의 능력과 용기가 중요한 거 아니에요? 왜 남에 의해 '떠밀려서' 하시려는 거에요?"

 "저는 기독교인데요, 이런 거에요. 제가 뭔가 바라는 게 있다면 저는 물론 그걸 위해 노력을 하겠죠. 하지만 제가 그걸 바란다고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제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있으면, 제가 저절로 그 쪽을 향해 떠밀려져 갈 거에요. 그러니까 욕심을 부리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그리로 가 닿게 될 거라는 믿음 같은 거죠."

 "아, 그렇구나..."

 말로는 '그렇구나'했지만 솔직히 난 잘 이해가 안 됐다. 나한테 종교적인 믿음이 없어서일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럻게 열정이 넘치는 미용사 아주머니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 열 수도 있을 1인 헤어샵이라는 꿈을 굳이 '떠밀려서' 해야겠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목표를 향해 노력해서 달성해낸다는 아주 명쾌한 인과 관계에 왜 굳이 제 3자가 필요한 거지? 


 이 책에는 저자가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야기를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래 사진 속에서 읽어보면 된다.


-로 했는데, 아직 테헤란으로 출발하지 않은 걸 보고 놀랐을 뿐입니다." 


 간발의 차로 불운을 피하게 된 데엔 저자의 그 어떤 노력도 들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신을 피하기 위한 하인의 노력은 신속하고 합리적이었으나 허사가 될 것이었다. 이 두 인과 관계엔 확실히 제 3의 변수가 들어가지만, 그것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뭘까? 운명은 우리 손으로 어쩔 수 없으니 체념하고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으니 적어도 어쩔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자는 거다. 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단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정말 성숙한 태도를 필요로 한다. 

 이걸 읽고서 미용사 아주머니가 떠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 블로그에만 봐도,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독후감에다 꿈을 향해 전진하는 무쇠같은 인간의 마음을 지탱하는 것이 과연 무얼까 궁금해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아주머니는 나보다 지혜로워서, 이미 뭉툭한 노력의 누적분이 언제나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꿈을 품고 언젠가 그를 펼치게 될 날을 인내심 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당장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내가 원했던 분야가 아니었기 때문에, 쌓여가는 일감에 허덕이면서- 언제나 손으로 어루만지던 꿈을 백팩에다 들쳐메고선 종횡무진하던 시절이 있었다. 두 손으로 일해도 모자라던 신입 시절, 굳이 내 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이 꿈이란 걸 추억처럼 어디다 잘 보관해둘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여기까지 같이 왔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바탕이 되는 일을 해서, 원했던 분야가 아니었지만 덕분에 응용력을 키울 수 있어서, 쌓였던 일들을 해나가며 쉽게 적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얼마나 감사한지. 투박하고 막연했던 꿈의 덩어리들을, 이제 조금씩 주물러가며 형태로 만들어갈 수 있게 된 건 모두 다 화장실에서 티 안나게 우는 법을 연구하던 그 시절 덕분일 거다. 

 대학 시절, 마음씨 착한 동기가 해줬던 말을 다시 떠올리며- '이 세상에 아무것도 헛된 건 없어.' 그리고 Knappily에서 뉴스 읽다가 마주친, 이 문장도. 'Wherever you are, be all there.'

 지금이야 망망대해의 한가운데지만, 내가 꿈의 방향키만 단단히 쥐고 있다면, 이 지루하고 끝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항해도 단순히 배가 뒤집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매일의 일과가 아니라 꿈을 향한 빛나는 여정인 것이다. 어떤 것들은 오직 폭풍 속에서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날엔 배가 '떠밀려서' 그림처럼 위기를 비껴갈 수도 있겠지. 삶이란 게 그런 거겠지.


* 선물 

 이 길고 긴 독후감을 끝까지 읽어준 당신에게 주는 선물. :)

 내 선물은 이미 내가 잘 챙겨줬다. 밤이 든 싱거운 빵과 따뜻한 흰 우유. 이 완벽한 점심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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